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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사도법관 김홍섭] “가난했지만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죠”

홍보부 2015-03-16 조회  1382

여론사람들
[사도법관 김홍섭] “가난했지만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죠”
고 김홍섭 판사 장녀 김철효(완숙 골룸바)씨
2015. 03. 15발행 [1305호]


고 김홍섭 판사 장녀 김철효(완숙 골룸바)씨


▲ 고 김홍섭 판사


▲ 김철효씨는 “아버지는 판사, 죄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고 말했다. 임영선 기자




평화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 ~1965) 판사의 50주기를 맞아 서울고등법원(법원장 심상철)은 16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에서 50주기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

이날 행사는 추념식과 평화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어느 법관의 삶- 사도가 된 법관 김홍섭’ 상영, ‘우리 시대의 사도법관’을 주제로 한 최종고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별강연으로 이어진다. 

김 판사 50주기를 맞아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의 특별기고와 김 판사의 맏딸 김철효(완숙 골롬바)씨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을 되짚어본다. 



어린 시절 김철효(완숙 골롬바, 70)씨 집에는 손님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손님들은 김씨 아버지에게 뭔가를 부탁했고, 선물을 가져오는 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수많은 부탁과 선물을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몰래 선물을 놓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김씨에게 “그 사람을 쫓아가 돌려주고 오라”고 시켰다. 60여 년 전 일이지만 김씨 머릿속에는 손님에게 달려가 선물을 건넸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판사의 맏딸 김씨는 “아버지는 어떠한 금전적 청탁이나 정치적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항상 청빈하게 생활하셨다”면서 “언제나 사람을 중심에 둔 판결, 청빈한 삶, 죄수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버지의 50주기를 앞두고 법원, 형제들과 함께 「사법의 혼, 진리의 구도자 - 법관 김홍섭 자료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김 판사가 생전에 썼던 글, 직접 찍고 그린 사진과 그림, 다른 법관들이 이야기하는 김 판사의 모습, 사형 판결을 내린 죄수들이 김 판사에게 보낸 편지 등 김 판사의 삶에 대한 모든 자료를 900여 쪽에 담았다. 김씨는 자료집을 준비하며 아버지의 삶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 

“어렸을 때(20세)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법관으로서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어요. 생전에 쓰신 많은 글들, 다른 분들이 아버지에 대해 쓰신 글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아버지의 삶을 맞춰나갈 수 있었죠. 어린 시절 식구(12명)는 많고 먹을 것은 부족했어요. 늘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어려서 개신교 신앙을 접한 김 판사는 서른 살 무렵 개신교 교리에 회의를 품고, 불교에 심취하게 됐다. 여러 산사를 찾아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했다. 하지만 불교 가르침에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해 9월 가족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저를 데리고 매일같이 새벽 미사에 참례하셨어요.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여 만과(저녁기도)를 바쳤고, 묵주기도도 자주 했죠. 전교를 정말 열심히 하셨어요. 친척들을 비롯해 동료 법관, 자신이 판결을 내린 죄수들에게도 전교하셨어요. 대자가 무척 많으셨죠.”

김 판사는 1965년 3월 16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8남매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김씨는 “돌아가시기 전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기억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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